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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심당이야기

성심당이야기

‘모든 이가 다 좋게 여기는 일을 하십시오’ 라는 경영이념으로 대흥동 성당의 오기선 신부님께서 주신 밀가루 두 포대와
피난에서 살아가게 되면 남은 일생을 가난한 이웃을 위해 바치겠다는 창업주의 기도를 바탕으로 시작된
나눔정신을 실천하는 성심당의 이야기 들어주실래요?

김태훈  글 박선향  그림 로드스쿨  제작

정말 추운 겨울이었어요.
여름부터 시작된 전쟁이 겨울까지 계속 됐거든요.
전쟁 때문에 사람들이 많이 죽고 다쳤어요.
동네가 전쟁터가 되어서 고향을 떠나야 하는 사람들도 많았어요.
임길순 아저씨가 살았던 함경남도 함주 땅도 그랬어요.
아저씨는 원래 과수원을 했어요.
아줌마와 네 딸, 이렇게 여섯 식구가 행복하게 살았어요.
하지만 전쟁이 모든 것을 빼앗아 갔어요.
살기 위해선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어요.

01 / 16

흥남부두로 향하는 피난길

'슈웅~~~~콰광! 슈웅~~~~ 콰광!'
멀리서 들리던 대포 소리가 어느새 동네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어요.
"애들아, 일어나. 어서 떠나자. 서둘러야 해."
아저씨는 새벽부터 서둘렀어요.
짐을 제대로 쌀 겨를도 없었어요.
피난길 사람들은 모두 동해 바다를 향해 걷고 있었어요.
육지 길은 전쟁 때문에 이미 다 막혔기 때문이에요.

02 / 16

피난 마지막 배, 메러디스 빅토리호 승선

힘들게 도착한 흥남부두는 이미 피난민들로 가득 차 있었어요.
다행히 군인들이 사용하는 군함과 화물선이 몇 척 남아 있었어요.
아저씨네 가족은 마지막 배인 '메러디스 빅토리호'에 올라 탔어요.

출발하고 얼마 안 있어 흥남부두는 폭파됐어요.
아저씨는 불타는 흥남부두를 바라보며 하느님께 맹세했어요.
"우리 가족이 살아난다면 평생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살겠습니다.”

흥남부두를 출발한 배는 이틀간 바다를 달려 크리스마스인
12월 25일 거제도에 도착했어요.그래서 '크리스마스의 기적' 이라고
부른답니다.

03 / 16

대전역에 멈춰 선 기차

아저씨네 가족은 거제도를 거쳐 경남 진해에서 잠시 살았어요.
전쟁이 끝나고 아들 영진이도 새로 태어났어요.
아저씨는 서울로 이사를 가기로 하고 기차를 탔어요.
그런데 잘 가던 기차가 그만 대전역에서 고장이 나고 말았답니다.

그때는 기차가 한 번 고장 나면 고치기가 무척 어려웠어요.
언제 다시 출발할지도 몰랐어요.
아저씨는 열차에서 내려 대전역 광장으로 나왔어요.
사람들도 많았고 분위기도 활기찼어요.
아저씨는 대전이 마음에 들었어요.

“얘들아, 여기가 대전이란 곳인데 어떻니?”
“사람도 많고 멋지고 좋아요.”
“우리 그럼 여기서 살까?”
“좋아요!”

아저씨는 서울에 가지 않고 대전에서 살기로 마음 먹었어요.

04 / 16

대흥동 성당에서 받은 밀가루 두 포대

아저씨는 곧바로 목척교를 건너 대흥동 성당을 찾아 갔어요.
아저씨의 이야기를 들은 신부님은 밀가루 두 포대를 선물로 주셨어요.
집에 돌아온 아저씨는 아줌마와 상의했어요.

“두 포대면 우리 식구가 제법 오랫동안 먹을 수 있겠죠?”
“하지만 언제까지 도움만 받으며 살 순 없잖아요. 이걸로 찐빵 장사라도 합시다.”

아줌마는 이튿날 빵장사하는 분들을 찾아가 기술을 배웠어요.
그리고 며칠 후 대전역 앞에 천막을 치고 찐빵을 쪄서 팔기 시작했습니다.
그 천막 기둥에 ‘성심당’ 이라고 적은 팻말이 비스듬히 세워져 있었어요.

05 / 16

대전역 앞 작은 찐빵집, 성심당의 시작

장사는 잘 됐어요. 맛있다고 소문이 나면서 손님들이 꾸준하게 찾아왔어요.
그런데 아저씨는 매일매일 장사를 일찍 끝내고 싶어 했어요.
장사하고 남은 찐빵을 싸들고 갈 데가 있었기 때문이에요.

부리나케 가게문을 나선 아저씨는 빠른 걸음으로 목척교 아래를 찾아갔어요.
전쟁 때문에 가난하고 배고픈 사람들이 그곳에 많이 모여 살았어요.
아저씨는 그분들에게 남은 찐빵을 매일 나눠주셨답니다.

“얘들아 안녕? 배고프지? 찐빵 같이 먹자!”
“와~ 찐빵 아저씨다~~ 오늘도 오셨어!”

목척교 아래 사람들은 매일 저녁 아저씨를 기다렸어요.
아저씨는 ‘평생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살겠다’고 하느님께
약속한 것을 이렇게 실천했답니다.

06 / 16

튀김소보로 개발

대전역 앞 천막가게 성심당이 커져서 은행동으로 이사를 왔어요.
진해에서 태어난 영진이가 어느덧 어른이 되어
성심당의 두 번째 사장님이 되었답니다.

새로 사장님이 된 임영진 아저씨는 새로운 빵을 만들고 싶었어요.
아저씨는 단팥빵의 달콤한 맛과 소보로의 고소한 맛,
그리고 도너츠의 바삭한 느낌을 한 번에 맛볼 수 있는
삼단합체 튀김소보로
를 만들어 냈답니다.
튀김소보로는 인기가 너무 좋아서 지금까지 8,000만 개가 넘게 팔렸답니다.

07 / 16

포장빙수 개발

여름철에는 성심당 팥빙수가 인기 최고였어요.
하루는 동네 할머니 한 분이 팥빙수를 사가겠다며 냄비를 들고 오셨어요.
아저씨는 안타까웠어요.
아무리 집이 가까워도 팥빙수를 냄비에 담아가면 금방 녹기 때문이었어요.

“팥빙수를 집에서도 먹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때 아저씨의 머리 속에 병원에서 링거병을 보관하던 스티로폼 박스가 떠올랐어요.
그 박스를 구해다가 팥빙수를 포장한 뒤 놀이터 철봉에 매달아 실험을 해봤죠.
얼마 동안 팥빙수가 녹지 않을까요? 무려 3시간 동안 팥빙수가 살아 있었어요.
성심당 포장빙수는 순식간에 대전의 자랑거리가 됐어요.
서울에도 이런 건 없었거든요.

08 / 16

생크림 케익 개발

우리나라에서 생크림 케이크를 두 번째로 만든 곳도 성심당이에요.
옛날 케이크는 모두 버터크림으로 만들었거든요.
버터 크림은 예쁜 모양을 만들기는 좋아도 느끼해서 먹을 수는 없었어요.
성심당 생크림 케이크는 달콤하고 부드러워서 빵과 함께 먹기가 너무 좋았어요.
아저씨는 ‘3분 즉석 케이크’ 라고 이름을 붙이고
손님이 보는 앞에서 바로 모양을 내고 포장을 했답니다.

성심당은 어느새 대전에서 최고로 크고 인기 있는 빵집이 되었어요.
튀김소보로와 생크림 케이크, 포장빙수 3총사가 성심당을 이끄는 대표선수였어요.
전국의 빵집들도 이런 성심당을 배우려고 대전에 많이 찾아왔어요.

09 / 16

성심당 화재

그런데 2005년 1월 성심당에 큰 불이 났어요.
빵 만드는 공장이 모두 타버려 더 이상 빵을 만들 수 없게 됐어요.
성심당의 사장인 임영진 아저씨도 이제 끝이라고 생각할 정도였죠.
그런데 이튿날 놀라운 일이 벌어졌어요.
성심당 직원들이 모두 복구 작업에 나선 거예요.
벽에는 현수막들이 내걸렸어요.

“잿더미 속의 우리 회사 우리가 일으켜 세우자!”

모두가 한 마음으로 힘을 합치자 6일만에 다시 빵을 구워낼 수 있었어요.
대전시민들도 다시 살아난 성심당에게 응원의 박수를 아끼지 않았아요.

10 / 16

나눔의 실천

성심당이 이렇게 큰 위기를 넘겨졌지만 임영진 아저씨는
임길순 할아버지 때부터 해오던 빵나누기를 멈추지 않았어요.
나누는 빵의 양도 계속 많아졌어요.

하루 장사를 하고 남은 빵은 잘 정리해서 어렵게 사는 이웃들에게 보냈어요.
성심당 빵은 유치원에도 가고 노인정에도 가고 대전역 광장에도 갔어요.
사랑이 필요한 곳이면 어디든 성심당 빵이 찾아갔답니다.

11 / 16

서울 롯데백화점 본점 팝업 스토어

한 번은 성심당이 서울 나들이를 갔어요.
서울에서 가장 큰 백화점에 임시 매장을 만들고 1주일간 성심당 빵을 열심히 구워냈답니다.
처음에는 대전 빵집을 서울 사람들이 얼마나 알까 싶어 걱정도 많았어요.
하지만 걱정은 금방 환호성으로 바뀌었어요.

성심당 튀김소보로를 맛보기 위해 서울 시민들이 줄을 서기 시작한 거예요.
그 길이도 놀이공원만큼 길어서 한 시간 반을 넘게 기다려야
겨우 튀김소보로를 살 수 있을 정도였답니다.
덕분에 성심당은 대전뿐만 아니라 전국에서도 유명한 빵집이 되었어요.

12 / 16

성심당의 고향, 대전역 입점

대전역에 있는 성심당은 2012년에 문을 열었어요.
임길순 할아버지가 대전역 광장에 천막을 치고 성심당을 시작한지 56년만이었어요.
임영진 아저씨는 감격했어요.

돌아가신 임길순 할아버지도 하늘에서 기뻐하실 거라고 믿었어요.
대전역 성심당도 처음부터 인기가 많았어요.

튀김소보로 줄이 길어서 기차 시간을 놓치는 승객도 있었고,
KTX를 타고 일부러 대전역에 내려서 성심당에 들렀다 가는 사람들도 많았어요.
성심당 빵들은 이렇게 대전역에서 KTX 타고 전국으로 퍼져나갔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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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심당, 대전의 문화가 되다.

성심당은 어느새 대전시민들이 가장 사랑하는 곳이 되었어요.
성심당이라면 어른이든 어린이든 누구나 들어가서 편안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죠.

주말이면 다른 도시에서 KTX를 타고 성심당을 찾아오는 사람들도 많아졌어요.
1년 중 성심당이 가장 많이 붐비는 날이 바로 성탄절이랍니다.

이날 손님들은 성심당 케익부띠끄에서 성탄절 케이크를 구입해
가족들과 사랑을 나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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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님의 식탁을 준비하다.

임길순 할아버지가 대전역 광장에서 시작한 성심당은 가톨릭 신앙 위에서 세워졌어요.
성심당의 ‘성심’은 거룩한 마음, 즉 예수님의 마음을 뜻한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 할아버지가 우리나라를 방문했을 때
성심당에서 아침과 점심 식사빵을 만들었어요.
하늘에 계신 임길순 할아버지가 이 장면을 봤다면 얼마나 기뻐하셨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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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이가 다 좋게 여기는 일을 하도록 하십시오

어느덧 성심당은 100년을 바라보는 빵집이 되었어요.
1956년 대전역 앞 작은 찐빵집으로 시작해 이제는 대전을 대표하는 큰 회사가 되었지요.
시대도 바뀌었고 사람도 많이 바뀌었어요.
그러나 그때나 지금이나 한 가지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답니다.
바로 ‘사랑의 문화’에요.
빵을 통해 어려운 이웃을 돕고, 또 모든 사람들과 평화롭게 지내려는 정신입니다.
성심당은 오늘도 대전에서 “모든이가 다 좋게 여기는 일” 을 하려고 땀흘리고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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